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 사랑을 믿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도대체 믿는 자는 누구인가?”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일까요? 신앙 연수가 긴 사람일까요? 기도를 오래 한 사람,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일까요?
그런데 성경은 단 한 번도 ‘믿는 자’를 그런 기준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믿는 자를 오해하면, 표적도 오해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이 말씀 앞에서 조용히 위축됩니다. “나는 아직 그런 표적이 없는데…” “나는 믿음이 부족한가 보다…”
하지만 문제는 믿음의 크기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믿는 자는 ‘무언가를 해내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그 사랑은 추상적인 말이 아닙니다.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잘하면 사랑하겠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변하면 용서하겠다”고 조건을 달지 않으셨습니다.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아직 돌아서 있던 그때에, 이미 사랑하셨습니다.
믿는 자란,
내 상태가 어떠하든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먼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돌아온 탕자는 무엇을 믿었을까
돌아온 탕자는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자격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단 하나를 믿었습니다. “아버지는 나를 내치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이유를 묻지 않았고, 설명을 요구하지 않았으며, 회개문을 먼저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달려와 껴안으셨습니다.
이 장면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믿는 자’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감정이 아니었습니다.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랑은 배신 앞에서도, 침묵 속에서도, 채찍과 조롱 속에서도 끝까지 내려간 사랑이었습니다.
십자가는 능력을 증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사랑을 확정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래서 믿는 자란, “예수님이 나를 위해 여기까지 오셨다”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믿는 자에게 표적이 따릅니다
순서를 놓치면 신앙이 흔들립니다.
표적이 먼저가 아닙니다. 능력이 먼저도 아닙니다.
사랑을 믿는 믿음이 먼저입니다.
그 사랑이 사람의 정체성을 바꾸고, 두려움을 몰아내고, 마음을 자유롭게 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자연스럽게 따라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것은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의 정체성 앞에서 어둠이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을 때 회복이 일어나는 것도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묵상
믿는 자란,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위에 치유도, 회복도, 자유도, 표적도 따라옵니다.
※ 이 글은 마가복음 16장의 말씀을 바탕으로 능력 중심이 아닌,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 묵상한 글입니다.